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자와 세이지 (문단 편집) === 토론토 심포니 음악 감독, 빈필과 베를린필 데뷔 === 이듬해인 1965년 토론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면서 뉴욕 필 부지휘자를 그만두게 되었으며, 본격적으로 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. 토론토 심포니에서는 1969년까지 재임했다. 1965년부터 RCA와 음반을 취입하기 시작했다. 처음에는 주로 협주곡을 반주하는 녹음을 맡았으나 이듬해부터 RCA는 그를 명문 [[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]]와 주선하여 차이코스프키, 베토벤, 슈베르트 교향곡 등을 취입했다. 1966년에는 스승 카라얀에 의해 세계적인 음악 축제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[[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]]를 처음으로 지휘하며 그의 이름을 유럽에 알리게 되었다. 같은 해 하반기에 [[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]]에도 데뷔했다. 1968년 뉴 재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고문이 되었고, 같은 해에 [[러시아]]계 [[혼혈]]인 이리에 미키[* 이리에의 조부는 [[러시아]] 백군으로 활동하다 내전 패전 후 [[만주]]로 건너갔다. 이후 [[도쿄]]로 유학을 간 이리에의 부친은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한동안 도쿄에서 살다가, 만주에 볼 일이 있어서 간 직후 행방불명되었는데 2019년 NHK 패밀리 히스토리 방송을 통해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패전 직전 만주로 간 직후 [[소련군]]이 만주로 진격하는 바람에 도망치지 못한 채 그대로 포로로 잡혀, 스파이죄 등으로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아 [[카자흐스탄]] 강제수용소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수감 9년째에 사망했다.]와 결혼했다. 두 사람 사이에서 작가 오자와 세이라, 배우 오자와 유키요시가 태어났다. 1969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 코시 판 투테를 지휘하며 오페라 지휘자로 데뷔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